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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0일  개성공단 폐쇄 

경제 협력을 통해 남북 평화를 싹 틔우던 공간은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평화의 시계는 5년 넘게 멈춰 있다. 기업 성장과 동시에 평화전도사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이행했던 입주기업들은 그 사이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이들은 정부의 일방적 공단 폐쇄가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으나 5년째 아무런 소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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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수 없는 개성… 빛나던 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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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식)는 말을 잘 듣습네까"

지난 2008년부터 8년 가까이 개성을 오갔던 입주기업체 직원 김모(47)씨는 아직도 당시의 기억이 선명하다. 금단의 영역에 가봤기 때문만은 아니다. 비슷한 생김새에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경계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그들과의 특별한 경험은 지금도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밥을 같이 먹을 수도, 식후에 가벼운 운동을 함께 할 수도 없었다. 소소한 안부를 묻는 것 외엔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제약이 따랐다. 정치·경제 문제는 절대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함께 모여 일을 하면서도 대화의 수위를 어디까지 맞춰야 하는지 정확한 선은 아무도 몰랐다. 혼란스럽고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이들은 함께 일하는 동료였다. 이념과 규제에 가로막혀 있지만, 그들도 결국엔 사람이었다. 독한 북한 담배와 부드러운 남한 담배를 바꿔 피워보기도 하고, 초코파이와 자일리톨껌을 건네주며 묻는 "아(자식)는 말을 잘 듣습네까"라는 안부 인사에 서로 미소 지으며 거리를 좁혀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남과 북은 한 공간 안에서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무너뜨리는 연습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통일 한반도의 시험 무대, 개성이었다. 김씨는 "만약 통일이 된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었다"고 말했다.

개성공단 주요 일지

우리가 잘 몰랐던 개성공단의 일상

황해북도 개성시 봉동리의 아침은 여느 남쪽의 아침과 다르지 않았다. 남측의 북적이는 출근길 풍경처럼 이곳 역시 개성 시내로부터 출발한 출근버스에서 북한 노동자들이 우르르 내려 일터로 바삐 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남북 노동자들은 한 공간에서 함께 일했다.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 자식들은 무슨 대학에 갔는지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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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 80불 상당 급여·생필품 '北 최고 직장'

북한 노동자의 월 최저임금은 73.87달러였다. 연장근로수당과 야간·휴일수당을 포함하면 많게는 150달러 이상 받기도 했다. 150달러는 당시 환율로 한화 17만3천원 정도다. 농사나 장사가 주된 돈벌이 수단이었던 북한 사회에서 직장에 출근해 임금을 받는 개성공단은 그야말로 '최고의 직장'이었다. 공단 노동자들은 매달 80달러에 달하는 북한 돈을 임금으로 받았고 이 밖에 설탕과 밀가루, 식용유 등의 생필품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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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우여곡절 다 넘었지만

재개만 기다리다 '타임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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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째 이어지는 입주기업 '희망고문'

저마다의 꿈을 안고 개성공단에 진출했던 기업들은 공단 재개만을 기다리며 자그마치 5년을 기다렸다. 그동안 10개 이상의 기업이 경영 악화로 사실상 문을 닫았다.

자동차 부품 전문 제조업체 (주)대화연료펌프는 지난 2004년 공단 시범단지에 입주했다. 입주기업 중 유일하게 계열사 공장을 포함해 두 개의 공장을 운영했다.

토지 매입부터 공장 신축, 설비 등 초기 투자비용만 200억원이 들어갔다. 공단 진출 이후 정부로부터 '글로벌 강소기업' 인증까지 받았으나 공단 폐쇄 이후 상황은 크게 나빠졌다.

200억원을 들인 공장을 개성에 그대로 남겨두고 온 탓에 충남 당진에 대규모 공장을 새로 마련하는 등 100억원을 추가로 투입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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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진카바링 보험금 탓 정부지원도 못받아

공단 입주를 꿈꾸며 지난 2008년 개성 현지에 착공을 시작한 협진카바링은 공장 내부 설비 설치를 앞둔 상황에서 2010년 정부의 5·24 조치 당시 신규 사업자로 분류돼 입주가 막혔다.

2013년 한 차례 공단 중단의 경험을 했으나 이후 정상 운영을 보장한다는 남북 합의를 믿고 우여곡절 끝에 2014년 입주에 성공했다. 하지만 2년 만에 다시 공단이 문을 닫으면서 꿈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매출 급감에 6천여개 협력업체까지 '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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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중소기업중앙회가 실시한 '개성공단 가동중단 5주년 입주기업 조사'를 보면, 입주기업 중 5곳이 폐업했고 11곳은 서류상으로만 기업을 유지하고 있다. 결번이나 비수신 등으로 연락이 닿지 않는 업체까지 더하면 실제 휴·폐업 기업은 이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조사에 응한 111개 입주기업 중 85곳(76.6%)은 공단 폐쇄 직전인 2015년에 비해 지난해 매출이 감소했다.

매출액 50억~100억원 기업의 평균 매출액은 2015년 106억원에서 2020년 66억원으로 38%가량 줄었고, 매출액 50억원 미만의 소기업 평균 매출액은 65억원에서 15억원으로 76%가량 대폭 떨어졌다. 연 매출액 50억원 미만의 기업 중 2015년 대비 지난해 매출이 증가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개성공단 폐쇄에 따른 피해는 입주기업만의 일로 그치지 않았다. 125개 기업과 연관된 6천여곳의 협력업체에도 피해가 전가돼 6만여명에 이르는 근로자들이 공단 폐쇄로 인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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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만 쌓이는 희망' 이제는 정치가 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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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대통령 대표공약 '공단 재개'
현정부 시간 1년밖에 남지 않아

문재인 정부가 남은 1년 임기 내 답보 상태에 빠진 남북관계의 해법을 찾고 개성공단 재개를 향한 진전의 물꼬를 틀 수 있을지 주목된다.

공단 재개는 문 대통령의 대표 공약 중 하나였다.

지난 2016년 2월 공단 폐쇄 직후 문 대통령은 자신의 SNS를 통해 "정부가 오히려 위기를 키우고 국민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라며 박근혜 정부를 강하게 질타한 데 이어, 이로부터 1년 뒤 대선 후보 시절에는 "정권교체를 이루면 당초 계획대로 개성공단을 2단계 250만평을 넘어 3단계 2천만평까지 확장하겠다"며 공단 3단계 프로세스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앞선 보수 정권과 달리 빗장을 쉽게 풀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국제 제재의 그늘 아래 공단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야속한 5년만 흘렀다. 이제 현 정부가 국민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시간도 1년이 전부다. 이 때문에 올해가 공단의 문을 다시 열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문 대통령은 올해 초 신년사를 통해서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핵심 동력은 대화와 상생, 협력이다. 언제든 어디서든 만나고, 비대면의 방식으로도 대화할 수 있다는 우리의 의지는 변함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문 대통령이 임기 내에 공단 재개에 관한 가시적 결과물을 내놓지 않겠냐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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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이나 만났던 남북 정상… 애프터는 없었다

개성공단이 폐쇄된 2016년 2월 이후 수차례 재개의 조짐은 있었다.

얼어붙었던 남북 관계가 일시적으로 해빙기를 맞으면서

남북 정상이 한목소리로 개성공단을 다시 열 수 있다는 점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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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짐으로만 끝난 '가동 재개의 꿈'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재개 기대감은 꽃을 피웠다. 서해 군 통신선을 비롯해 판문점 연락채널이 복원되며 남북 간 연락망이 하나둘 회복됐고 평창 동계올림픽 북측 선수단 참여, 남측 예술단 평양 공연 등 문화적 교류도 활발히 이뤄졌다.

이는 곧 남북 정상 간 만남으로 이어졌다. 2007년 이후 11년 만인 2018년 4월 성사된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민족 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해 10·4 선언에서 합의된 사업들을 적극 추진해 나간다'고 밝혔다.

이후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공단 재개의 불씨는 더욱 당겨졌다. 두 정상이 회담을 마친 뒤 서명한 평양공동선언에는 '남과 북은 조건을 마련하는 데 따라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사업을 우선 정상화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처럼 2018년에만 남북 정상이 세 차례나 만나며 공단 재개의 기대감은 증폭됐다.

하지만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남북 관계는 다시 급속히 얼어붙었다. 급기야 지난해 6월 북한이 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청사를 폭파하면서 눈앞으로 다가왔던 공단 재개의 꿈은 결국 흩어져버렸다.

공단 재개를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은 있었으나, 결론적으로 미흡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경인일보가 지난 10~15일 SNS를 통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238명 중 절반 이상인 58.4%(139명)가 공단 재개를 위한 정부의 대처가 적절치 못했다고 답했다. 긍정적 답변은 14.3%(34명)에 불과했다.

개성공단 재개 관련 인식 설문조사

3월 10~15일까지 페이스북 계정에서 네이버 오피스폼을 통해 온라인 설문조사 진행 총 238명 응답함

남북관계 꼬인

실타래 풀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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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의 '3년 전 봄날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가 공개된 이후 남북 관계는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현시점에서 개성공단 재개는커녕 당분간은 남북 간 대화조차 단절될 것이라는 우려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역으로 이런 악조건 속에서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는 건 결국 경제적 협력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반도 평화의 마중물인 개성공단이 지닌 상징성과 가치가 여전히 주목받는 이유다.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해 분위기 반등의 모멘텀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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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대선·올림픽…

'반등 모멘텀' 으로 작용할까

미국이 사실상 남북 관계의 절대적 키를 쥐고 있는 만큼, 바이든 행정부가 조만간 어떤 대북정책을 내놓을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대북 기조를 점진적·단계적으로 가져가며 제2의 오바마 정부로 복귀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는 가운데, 바이든 행정부는 현재 포괄적인 대북정책을 검토 중인 단계다. 

 

1년 앞으로 다가온 대선 역시 공단 재개 관련 하나의 변수가 될 수 있다. 대선주자들이 공단 재개를 남북문제의 공약으로 끄집어낼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면서 이후 정권 변화에 따른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권 내 차기 대선주자로 꼽히는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경우 아직은 국제 제재를 의식한 듯 공단 재개에 신중한 입장이지만, 또 다른 강력한 주자인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공단 재개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일찌감치 포문을 연 상태다.

코로나19로 연기돼 올해 치러질 도쿄올림픽도 남북 관계 개선에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앞서 지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최초로 단일팀 구성이 성사돼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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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임기 초반에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시기를 놓쳤다"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김병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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